6.25 동란이 일어난지 벌써 57년이 됩니다. 북한의 인민군은 남한 국민이 자고 있는 일요일 새벽에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으로 38선을 넘어 왔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월요일에나 알게 되었겠지요. 내 나이 열살이었던 어느 여름 날 아침, 우리는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듣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지금도 초등학교에서 이러한 조회가 있는지는 몰라도 화창한 초여름 하늘 아래에서 기관총소리가 들리면서 생전 보지도 못했던 전투 비행기들이 연기를 내뿜으면서 날아다니는 그 장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총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귀가 조치당해 집으로 일찍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시작인 줄도 몰랐던 나는 그 날 오후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길가에서 우리 국군장병들이 흙투성이가 되어 용산 국군기지로 행진해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 때 우리 아버지께서 부산으로 전근되어서 먼저 가시고 어머니와 우리들은 짐을 꾸려놓고 기차를 타고 가려던 중이었습니다.
그 뒷날 들은 이야기지만, 한강다리가 끊겼기 때문에 기차를 탈 수 없어 서울을 떠날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아버지의 소식도 못 들은 채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에서 3개월을 살면서 먹고 있던 양식도 인민군에 동조하던 민간인들이 가져가고 정성을 다해 기르던 진돗개도 그들의 술안주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체포명단에 있던 저의 아버지를 찾는다는 핑계로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가져갈 것이 있으면 모두 가져가곤 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몇 달 후 어느 날 밤 요란한 대포알 날아가는 소리와 함께 큰 불빛들이 우리가 사는 용산구 후암동에까지 번쩍거렸습니다. 우리는 꾸려 놓은 짐들을 방탄벽이 되도록 문 앞에 쌓아놓고 침대 밑에 들어가 긴 밤을 보낸 기억이 납니다. 이것이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이 시작되던 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첫 날이기도 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사시던 외할머니께서도 이때 포탄의 희생자가 되어 뒷산 공동묘지에 묻힌 신세가 되었지만, 이 인천상륙이 없었으면 아버지가 남한의 공무원이었다는 이유로 우리는 요덕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어간 영혼이 되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치뤄진 전쟁의 끝은 비참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죽은 민간인들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습니다. 유엔의 안전보장이사회는 6.25동란을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인정하여 16개국에서 수많은 외국 장병들이 유엔의 기치 하에 전쟁에 참가해 많은 목숨이 희생되고 많은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6.25동란"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한국전쟁"이라고 한답니다. 그리고 역사적인 문헌에 의하면 이 전쟁이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한에서 시작한 남침이 분명한데도 아직도 북한사람들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해방 후에 군정을 하고 있던 미군들도 일본으로 철수한 상태여서 미국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미국이 전쟁을 시작하였다면 왜 주한 미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켰겠습니까.
이제 이러한 비극의 흔적은 지금 남한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북한에 사는 동포들은 불행하게도 이 전쟁의 원흉이 미국이라고 지금까지도 그들의 가슴에 묻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펼치고 있는 교육 때문입니다. 이러한 교육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분단이 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며 나 또한 9년의 옥살이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최근 한국의 한 월간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38%의 초등학생이 6.25를 잘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한국에는 초등학생 뿐 아니라 국가 지도자들 중에도 6.25전쟁을 잘 모르고 있는 분들이 요직에 앉아있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는 북한의 주장과 같은 생각을 가진 지도자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57년 전에 동포의 비극을 가져 온 이 전쟁을 제대로 전하는 교육이 절실히 필요할 때입니다. 역사는 바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을 자유민주국가로 유지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호국 선열들과 자유를 위해 희생당한 우방국 장병들에게도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