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김 후원회 - 우리는 그를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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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로버트 김 자택 방문기

작성자 : 관리자 /

작성일 : 2004-05-28

지난 5월 21일(금), 로버트 김이 있는 워싱턴 근교 버지니아로 출발하였다. 5개월 만의 만남인데,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올 1월에 앨런우드에서 가족이 있는 버지니아로 이감되었고, 올 3월부터는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다.

출소를 앞둔 장기수들에게 사회적응 기간을 주기 위한 배려인데, 모든 재소자들에게 이런 기회가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모범수여야 하고, 교도소의 추천이 있어야만 한다. 로버트 김은 이 최장기간 혜택을 받기 위해 까다로운 서류 심사를 몇 번이나 거쳤었다.

아직 재소자의 신분이지만, 교도소 밖에서의 만남이니, 더 이상은 면회가 아닌 셈이다. 내가 그를 안 것이 올해로 6년째, 교도소로 편지를 보내고, 교도소로 면회를 가다가 자연인으로서의 그를 만나려니 나 또한 감회가 새롭다. 그를 만나기 위해 옷 속 먼지 하나까지도 다 털어보여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 제한된 면회시간, 그리고 아쉬운 이별...무엇보다 두 노부부의 헤어짐을 지켜보는 것이 참 안타까웠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대도시는 교통체증의 연속이다. 하지만 고속도로 위에 끝없이 이어지는 산업차량의 행렬을 보며 활기찬 도시 분위기가 부럽기도 했다. 우리의 고속도로는 어딜 가나 행락차량이 더 많지 않은가.

사업차 미국에 왔지만, 업무를 보면서도 로버트 김 일이 머리에 꽉 차있었다. 출소가 다가오고, 혹 출소 전 마지막 만남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할 얘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로버트 김의 조카인 마이클이 운전 겸 안내를 맡아 동행했다.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아시아 최고 갑부인 중국인에 대해 얘기해주었는데, 그는 세계의 항만 구입에 주력한다고 했다. 우리의 광영만도 그 사람 소유라고 한다. 또한 다음 세대 정보통신을 주도할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군지는 잘 모르지만,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원대한 사고를 가질 수 있는 그의 안목과 신념에 부러움과 함께 많은 자극을 받았다.

한편으로 나는 미국 속에서 우리나라의 경쟁력도 확인하였다. 사회보장번호 문제로 관청에 갔는데, 놀라운 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우리의 경우 동사무소에 가서 인감증명이나 주민등록등본 같은 서류를 떼는 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타 지역의 서류가 필요한 경우에도 몇 시간이면 처리된다. 그만큼 전산화가 잘 되어있고, 효율적으로 업무를 처리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국가 경쟁력이다.

버지니아로 향하는 길은 잘 닦여진 도로, 신록이 무성한 나지막한 산들이 이어지는 아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하얀 집들이 나오더니, 이윽고 한국으로 치면 연립주택 단지 같은 아담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단지 끄트머리쯤에 이르자 로버트 김이 집 앞에 나와 있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집에 살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안정된 모습이다.

내가 보기에는 얼굴이 참 좋다. 그렇게 인사를 하니 몸 상태가 안좋다고 한다. 엊그제 지금 일하는 세탁소 사람들과 함께 한국인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점심식사 후 콜라를 마셨는데, 카페인 때문인지 그날 밤 잠을 설쳤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금요일은 TGIF(Thanks God, It's Friday!)라고 하는 유명한 문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토요일같은 분위기이다. 주5일제가 정착하다 보니 금요일 저녁부터 주말이 시작된다. 로버트 김이 집에 돌아오는 날도 금요일이다. 마침 그의 아들 월터도 집에 와있었다. 내가 온다는 말을 듣고 사온 술을 한잔씩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다.

“좋으시죠?”

“좋다마다요...”

장명희 여사의 짧은 대답 속에서 가장이 집에 있는 데서 오는 안정감과 행복이 느껴졌다.

요즘 로버트 김이 집에 돌아오면 하는 주요 일과 중 하나는 인터넷을 배우는 것이다. 그가 수감되던 8년 전에는 인터넷이 막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시간날 때마다 후원회 홈 페이지도 방문하고, 뉴스도 보면서 정보통신의 놀라운 발전을 실감하고 있다고 한다.

그에게는 너나 할 것없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신기하기는 마찬가지다. 앨런우드에서 버지니아로 이감될 당시 휴대전화로 한국과의 전화 인터뷰를 했는데, 처음 손에 쥐었을 때는 뭔지 잘 몰랐다고 한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8년간의 수감생활로 그의 생활감각과 세상인식은 많이 무뎌져있다. 어린 아이처럼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것이다. 출소 후 그가 괴리감이나 충격 없이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세심한 배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를 흔들어놓지 말고, 충분히 준비하고,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세상 앞에 설 때까지 기다려줘야 한다.

출소까지 앞으로 두달, 조심스럽게 현재 진행상황에 대해 말문을 열었다.

“지금 국방부, 청와대 등과 접촉하고 있는데, 눈에 보이는 진전은 없다..”

“괜찮다. 결과에 대해 너무 신경쓰지 말라... 솔직히 말하면 걱정이 많다. 우선 아내의 건강문제가 제일 심각하다. 현재 살고 있는 집은 2층, 3층. 2개층 복층 구조인데, 관절염이 심한 아내가 조금이라도 편히 살 수 있도록 단층집으로 옮기는 것이 가장 급하다.”

내게는 연금을 박탈당했으니 당장 수입원이 없는 생활도 그렇고, 취업을 원하는 그에게 맞는 일자리가 있을지도 걱정이다. 게다가 15만 킬로이상 달려 덜덜거리는 낡은 차도 무척 위험해 보인다.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가 많은데, 정작 그는 차분하고 담담하다.

그는 현재 가장 중요한 사안 중 하나인 보호관찰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 문제에 대해 걱정해주는 분들이 많은데, 나 스스로 해보려고 한다. 출소 후 1년이 지나면 보호관찰 해지를 신청할 수 있다. 차근차근 서류 준비해서 자격이 주어지면 신청할 계획이다.”

막대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고용한 변호사도 큰 도움이 안되었고, 혼자 법전을 공부하고, 관련 자료를 찾아가며 재심청구, 최장기간 신청 등 중요한 서류들은 준비한 그였다. 이런 경험도 있고, 주변의 도움을 기대하고 가만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사실 그가 수감된 직후부터 계속된 후원활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에게 도움 된 건 거의 없었다. 사건 초기에는 정치적, 외교적인 논란이 있었고, 이후에는 보호관찰, 사면 문제가 주요 관심사였다. 하지만 그의 어려운 경제상황을 감안하면, 말 그대로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

생계수단, 불편한 집, 낡은 차...그에게는 이런 문제해결이 더 시급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구체적으로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더구나 그가 분명히 보호관찰 부분은 스스로 해보겠다고 밝힌 이상 더더욱 경제적인 문제를 최우선 순위로 삼아야 한다. 그가 초라하게 산다면 한국인 전부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상태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 그래서 고민 많지만, 과거에 대해 결코 후회는 없다. 당시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 모두 자기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다. 죄목에 비해 과다한 형량을 구형하고 선고한 검사나 판사에게도 유감없다.”

그는 사건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한국 정부에 대해 당당하게 피해보상을 요구한다고 해도 그를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는 어려운 현실 앞에서도 후회는 없다고 한다. 그의 신념과 의지 앞에 숙연함을 느꼈다.

사람들은 그가 한국 정부에 제공한 정보가 뭐였는지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중요한 것은 그가 한국을 돕기 위해 정보를 제공했고, 그로 인해 너무도 가혹한 댓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가 한국을 도왔던 순수한 동기이다.

그는 자신과 아내, 두 사람의 인생을 내게 맡긴다고 했다. 본인으로서는 누구보다도 상황을 잘 알고,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드러낼 수 있는 나에 대한 믿음에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오죽 답답했으면, 하는 생각에 지금까지 지지부진한 상황이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이제 상황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1. 대선으로 인해 분위기가 어수선한 상횡에서 사면문제를 거론하기는 어렵다. 일단 올해는 출소 후의 생활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보호관찰은 로버트 김에게 맡겨두고, 도움이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든 나선다.

3. 경제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한다.

지금 출소 후 그의 거취에 대한 관심이 높다. 한국에 오느냐, 안오느냐, 어떤 일을 하느냐 등등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그에게 “한국에 와서 살라는 사람은 조심하라. 미국에 있으면서 강연이나 그 외 다른 역할을 찾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시간을 갖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얘기를 나누며 여러번 느꼈지만, 그에게는 일하고자 하는 욕구가 많다. 한국에 오면 건강진단을 받고 싶다고 했는데, 이 또한 아직 얼마든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과 자신감을 보여주고 싶어서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일을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상황이다. 후원회나 주변의 도움으로 여생을 보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막연하게 정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다. 아무리 큰 도움을 받더라도 그건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는 없다.

저녁이 준비되었다고 해서 식탁 앞에 앉았다. 삼겹살, 된장국, 소박하지만 정갈한 차림이다.

“감옥에서 비슷한 죄목의 재소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다들 20년, 30년 사는 사람들이다. 그에 비하면나는 8년 만에 나올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게다가 그 사람들 대부분은 이혼자이다. 나와도 그를 반겨줄 가족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가족이 있다. 지난 세월 꿋꿋하게 견디면서 기다려준 아내가 정말 고맙다.”

집안을 찬찬히 돌아보니, 깔끔한 분위기에서 맑은 기가 느껴진다. 장명희 여사는 페인트칠도 직접 하고, 구석구석 꾸미면서 남편을 기다렸다고 한다. 두 사람이 사랑과 신뢰 속에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의 집에서 하루 머물게 되었는데, 자상하게 잠자리를 봐주고, 자리끼까지 신경쓰는 장여사의 모습에서 어머니의 따뜻함이 전해졌다. 이 가족을 보며 돈이 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며,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찾아온 엄청난 일을 지금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바로 이 돈독한 가족애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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